2013년 4월 12일 금요일

신화의 이상한 매력 1) 이메일 아이디 정하기와 나의 신화적 정체성


내가 과연 단군의 자손일까?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어렸을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배웠다. 우리 모두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또 그 아버지에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단군이라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단군은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건국했고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왕실의 피를 물려받은 것 같지는 않다.  내 조상은 단군이 내려와 나라를 만들때, 원래 그 동네에 살던 무지렁뱅이였을 것 같다.  나라를 건국하고, 큰 일을 도모하는 건 나랑 도무지 잘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럼 난 단군의 자손이 아니라 단군의 백성의 자손인 거고, 그걸 다시 표현하면 단군세력의 피지배층이었던 사람의 자손인거다. 대대손손 아주 잘나가는 사람들 밑에서 눈치나보며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시켜나가는 작고 작은 평범한 백성. 

왜 나는 단군에게 정이 가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집안 사람들은 털이 별로 없고 가늘가늘하게 생겨서 단군집안이랑은 아주 거리가 먼 듯 한데, 왜 나는 단군신화를 들으면 참 내이야기 같고 가슴이 설레고 그러는 걸까? 참 넓기도 한 오지랍이다. 온 세계의 신화를 다 읽어봐도 개인의 영달을  위해 싸운 영웅들 투성이고, 간혹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영웅이라도 [홍익인간]같이 참으로 아름다운 정치철학을 선언한 신화는 읽은 적이 없다. 그래서 난 단군 신화가 나랑 상관있는 신화이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홍익인간,  그 평화의  철학이 성공한 유일한 사례

좀 오래된 자료긴 하지만 잠시 아래 자료를 살펴보자. 우리가 세계 10강에 들어간다는 중국의 분석이 담긴 자료다.  

2006년 1월 5일 중국사회과학원 발표자료

이 자료를 보면서 난 참 한국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들 중에 한번도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다른 나라의 자원을 훔쳐오지 않고 성장한 나라가 있는가?  중국과 인도, 러시아는 그렇게 덩치가 큰 나라를 경영한다는 것 자체가 정체성이 다른 주변국을 식민지로 삼아왔다는 뜻이다. 캐나다는 당연히 북아메리카 선주민들의 자원을 도둑질한 것이고 말이다. 뭐, 역사발전의 흐름에서 다른 나라를 침범하는 일이 옳다 그르다 한번도 안했다, 그런 적이 없다. 혹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것도 식민지배아니냐 하면 할말이 없다. 그런데, 저 위의 나라들 중에 우리나라가 주벽국에 대해 가장 덜 호전적이고, 가장 작은 국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래서 난 우리민족이 홍익인간, 그 평화의 철학이 우리 마음 속에 변함 없이 남아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으려 도박하지 않았던 민족, 그냥 우리끼리 살기도 너무 바쁜 사람들이다.  남의 나라 것을 도둑질해오지 않고 이만큼 성장한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난 생각한다.  참 작고 예쁘고 멋진 나라인 것 같다.

그래, 난 단군의 자손 할래. 멋지니까.

혈통이나 계통적으로 아무리 의문점이 남는다 해도 철학적으로 내가 그들의 후손이라고 생각되고 그렇게 믿고싶다면 나는 단군의 자손이 맞을 것이다. 아니 단군의 자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정당성을 갖는다. 그 권리와 정당성은 사실 [궁민학교]시절 선생님들이 참 열심히 불어넣어 주셨던 민족적 자긍심의 결과다.   정서적으로 정이가고, 지역적으로 일치하며, 혈통적으로 근접해있고, 철학적으로 공감한다면 나는 이제 훌륭한 민족주의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된다. (민족주의자는 호의호식하진 못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때 오랫동안 칭찬받는다. 백범 김구,  단재 신채호,  민족주의자였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민족을 위해 공을 세웠던 이순신장군, 세종대왕처럼 말이다.) 

그런데, 단군은 남자잖아.

누군가는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지향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캐릭터가 본인과 다른 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어떻게 보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을 거다. 요즘처럼 타고난 성을 마음껏 넘나드는 시대에, 민족과, 국가 지역적으로 그리고 성적으로 나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찾으려 애쓴다는 것이 웃기는 일일 수도 있다. 이건, 마치 내가 피라미드에 관광을 갔는데 이집트 애가  '어? 이집트 사람도 아닌 니가 뭘 이리 큰 돈을 들여서 피라미드에는 웬일이야?"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런데, 나랑 닮은, 혹은 관련있는 무엇인가를 내 삶의 기치로 삶는다는 건 참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절절하게 깨닫고 있다. 왜냐면 이메일 때문에.

삶의 지향점. 나의 정체성. 온라인 세상에서의 아이디 정하기.

한때 내 이메일 아이디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모로코라는 나라 이름이 들어간 것이었다. 세계 각국의 독특한 건축, 인테리어 문화를 보여주는 책을 읽었는데, 그때 모로코 스타일에 흠뻑 빠져서 모로코가 들어가는 이메일과 스카이프 아이디를 갖게 되었다. 나는 모로코라는 나라의 역사도 배경도 그 나라에 사는 사람의 민족적 종교적 특징도 알지 못하지만 그냥 그 나라 집들의 특징이 나의 정서를 심하게 건드렸기에 나는 모로코를 좋아한다고 말하게 되었고 내 닉네임, 혹은 아이디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내 스카이프에는 각종 아랍글자로 혹은 압둘, 흐즈크 뭐시가 들어가는 낮선 이름의 남자들이 보내는 메시지로 불이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왜 내게 접속해 오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나라를 사랑하는 동포를 만난 기분이 아닐까 싶다. 왜 우리도 80년대 까지는 외국에서 태극기만 보면 눈물이 울컥 나던 시절이 있지 않았나.  

인터넷 세상의 내 분신 ; 아이디를 정할 때는 훌륭하거나 매력적이거나 본질적으로 나 자신이거나...

나는 명함을 받아들면 그 사람의 이메일 아이디를 먼저 본다. 이 사람의 관심사는 어떤 것인가? 허세가 많은가. 노골적인가. 장난스러운가. 혹은 자기 이름 이니셜 뒤에 태어난 년도 두자리를 넣는 그런 스타일인가. 다른 사람이 기억하기 좋게 만드는 가, 아니면 스펨메일 깨나 보냈을 듯한 무의미한 글자들의 나열인가. 그래서 난 내 아이디 정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나는 누구인가. 각종 광고메일과 옛날애인의 찔러보기 편지등으로 오염될 만큼 오염된 내 과거를 덮고 새 인생을 살기 위해 새로운 매일을 사용하려 결심했을때. 나는 이 거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내가 꿈꾸는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떤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싶은가? 그리고 그걸 한 마디로 줄여서 뭐라고 부르면 된단 말인가!

사실 신화속에서 내 정체성을 찾는 것의 발단은 새 이메일의 아이디를 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유치하지 않고 흔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는, 그래서 내 인생의 가치와 철학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이름을 내 아이디로 정하고 싶어서 신화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때는 수메르 신화의 지혜의 신 [엔키]가 들어가는 아이디를 쓰기도 했고, 참 불쌍하고 안타까운 악당인 북유럽 신화의 [로키]를 쓰기도 했다. 내가 원래 아름다움이나 다산과는 거리가 아주 멀어 여신 중에는 그다지 쓸만한 아이디를 찾지를 못했다. 이시스는 너무 흔하고, 시바의 여왕은 주로 아프리카계 여성들이 사용하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신들 이름은 거의 모두 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사용되고 있고, 그래서 내가 찾은게 뭐였냐면...


(내가 찾은 이름이 뭐였는지는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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